[잡학사전]
禁書(금서)에 숨은 역사


청군의 80만 학살 밝힌 ‘양주십일기’ 청조 타도 의식화 교재로
히틀러시대 금서 1호는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국민가수’ 이미자씨가 데뷔 50주년을 맞아 10월에 전국 순회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의 대표곡인 ‘동백아가씨’는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5공화국 때는 금지곡뿐만 아니라 금서(禁書)도 적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서의 역사는 길다. 정권의 정통성이 약하거나 집권자의 권력욕이 강하면 금서 목록이 대폭 늘어난다.

서양의 대표적 금서로는 독일인 에두아르트 푹스가 쓴 ‘풍속의 역사’를 들 수 있다. 풍속의 핵심은 성풍속이며 성풍속의 변화 뒤에는 경제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책은 히틀러시대의 금서 1호 격인 책이다.

청나라 때의 대표적 금서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는 책이 있다. 청나라 초기 청군이 중국 강남의 양주성을 함락시킨 후 1645년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열흘간 양주 주민 80만명을 학살했다. 당시 청군은 명나라 잔존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양주에서 큰 피해를 입자 본보기로 양주성민을 모두 도륙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대대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이때 양주 주민 왕수초(王秀超)는 청군에게 가족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청군의 만행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책이 ‘양주십일기’다.

일부 구절을 인용해보자. “이윽고 해가 저물자 청국 군사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아우성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성내 곳곳에서 불이 일어나 화염이 오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이날 나는 형과 형수 그리고 동생과 조카, 넷을 잃었다. 이제는 장형과 나 그리고 아내 세 사람만이 남았다.”

이 책에는 무자비한 도살은 물론 강간, 윤간과 간살(姦殺)에 대한 묘사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양주대학살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 알려면 ‘난징(南京)대학살’과 비교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난징대학살은 지금도 중·일 간 극한 대립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사건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사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40여일간 일본군이 중국 난징에서 약 30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양주대학살은 불과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약 80만명을 학살했으니 규모와 잔혹성 면에서 난징대학살을 훨씬 능가한다.

양주대학살은 청나라 초기의 대학살극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다. 청 초기 청군에 의한 대살상극을 흔히 ‘양주십일, 가정삼도(嘉定三屠)’라고 한다. 가정삼도는 다음과 같다. 1645년 청군이 남경을 점령함으로써 명나라 잔존 세력인 남명(南明) 홍광(弘光) 조정이 멸망했다. 이후 청조의 변발령에 반발해 강남 여러 곳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고 청조는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했다. 지금의 상하이(上海)가 속한 가정성은 세 차례에 걸쳐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 이것을 ‘가정삼도’라고 한다. 양주대학살을 생생하게 묘사한 ‘양주십일기’는 청나라 초기부터 금서 중의 금서로 지정됐다. 이 책은 중국 내에서는 잊혀졌으나 일본으로 흘러들어갔고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재발견된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을 꿈꾸던 한족(漢族) 지사들이 대거 일본에서 망명 중이거나 신학문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양주십일기’를 발견하고는 울분과 흥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후 이 책은 다시 중국으로 밀반입돼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한족 지사들의 의식화 교재로 널리 활용됐다.

출처 : 주간조선 200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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