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 공 세운 무신에게 내리는 시호(諡號)… 조선시대에만 9명 가정의 달 5월이다. 자녀와 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사퀴즈를 풀어보자. ‘충무공`=`이순신’은 맞는 말인가? 정답은 ‘아니오’다. 우리 역사에서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뿐만 아니라 여러 명 있기 때문이다. 충무(忠武)는 큰 공을 세운 무신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시호(諡號)로, 조선시대에만 9명의 충무공이 있다. 충무공(忠武公) 하면 떠오르는 이는 아무래도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다. 임진왜란 때 크나큰 공을 세운 인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분이다. 이순신 장군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충무공 하면 이순신 장군을 연상하게 되고 이순신 장군이 곧 충무공이라고 인식된 것이다. 조선시대 충무공 중에는 유명인사가 적지 않다. 출생 연도 순으로 살펴보면 조선 개국공신 조영무(趙英武·?~1414)가 조선 최초의 충무공이다. 10여년 전 사극 열풍을 일으킨 TV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장항선씨가 조영무 역을 맡아 명연기로 화제가 됐다. 조선 초기 비운의 무신 남이(南怡·1441~1468) 장군도 충무공이다. 남이 장군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훗날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는 한시는 그의 호연지기를 잘 말해준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국방장관)까지 올랐으나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역적으로 몰려 국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를 지내다 순직한 김시민(金時敏·1554~1592) 장군도 충무공이다. 김시민 장군은 1592년 음력 10월 제1차 진주성전투를 지휘해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는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에 속한다. 충무공 정충신(鄭忠信·1576~1636) 장군은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1633년 조정이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해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천문·지리·역학(易學)·의술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김응하(金應河·1580~1619) 장군은 남의 나라 전쟁터에 파병돼 전사한 비운의 무장이다. 그는 1618년 명나라가 여진족 건주위(建州衛)를 치려고 조선에 파병요청을 하자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참전했다. 그는 고작 3000명의 병력으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1620년 명나라 신종이 그를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追封)했다. 세간에 비교적 덜 알려진 충무공도 여럿 있다. 조선 전기의 왕족인 구성군 이준(李浚·1441~1479)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해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고 광해군 때 3차례 북병사가 되고 이괄의 난 때 사도부원수 평안병사가 되어 안현에서 반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구인후(具仁垕·1578~1658)는 광해군의 폭정에 반감을 품고 반정모의에 참여했고 정묘호란 때 후금군을 막아 싸웠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위했다. 출처 : 주간조선 2009.05.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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