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색맹이라 이 세상을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본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인간과 달리 붉은색 바깥의 적외(赤外)선과 보라색 너머의 자외(紫外)선을 볼 수 있는 외계인이 있다면 그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 하는 점이다. 평생토록 2차원 평면을 기어다니는 개미는 입체공간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다. 3차원 공간을 경험하는 인간에게는 개미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많은 것이 사실은 인간의 제한된 감각과 인식 범위 안에서 포착한 주관적인 것이다. 이 세상은 인식 주체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저만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인간이 나름의 관점에서 구성해낸 것이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진리도 마찬가지다. 진리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고 오류 가능성이 있는 일종의 '믿음'에 불과하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뒤엎고 지동설을 주장해 말 그대로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루었지만, 그의 도전적인 주장이 일순간에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천문학자 브라헤는 여전히 천동설을 옹호하기 위해 행성을 관측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케플러는 동일한 자료를 토대로 지동설을 주장했고 나아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동일한 관측을 통해 브라헤는 지구 주위를 회전하는 천체로서의 태양을 보았고, 케플러는 지구가 그 주위를 회전하는 태양계의 중심으로서의 태양을 본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근대 자연과학의 기반인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을 부정했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적인 사고를 무너뜨렸다. 이 이론들은 뉴턴식의 고전 물리학이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고 보면 언제 또 어떤 이론이 등장해 우리가 현재 진리라고 믿고 있는 이론을 반박하게 될지 모른다.
학교에서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라고 배운다. 이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성립하는 명제이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구면기하학에서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고 쌍곡기하학에서는 180도보다 작다. 이 중 어느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틀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셋 다 나름대로 타당한 '다른' 주장이다.
흔히 과학과 수학은 시공을 초월한 절대 진리를 담고 있는 학문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지식의 순차적인 축적 과정을 통해 발전해 온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과학과 수학은 옳다고 당연시되던 지식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과정을 거쳐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진리를 판정하는 항구적이고 초역사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떤 이론도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은 인문.사회과학뿐 아니라 과학과 수학에도 통용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은 어느 정도 옳으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오류가 내포된, 그래서 수정과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며, 기존 지식을 반박하는 반례가 등장해 그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지식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왔다.
이 세상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으며 진리와 거짓의 구분은 다분히 상대적이며 상황과 맥락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자신의 생각이 완벽한 참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 자칭 '진리의 대변자'들은 컬러를 보지 못하는 개나 입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개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사고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이를 개선해 나가는 과정으로 인해 보다 높은 수준의 사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정직한 구도자'의 마음이다.
박경미 홍익대 교수.수학교육'
출처] http://service.joins.com/news_asp/narticle.asp?aid=2417180
해수면을 고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바닷물의 전체 양이 변하지 않아 해수면이 거의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고 바닷물이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냥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의 양은 유지되지만 내부에서는 부단한 변화가 지속된다. 비가 오고 강물이 흘러들면서 늘어나기도 하고 바닷물이 증발해 수증기가 되면서 감소하기도 하지만, 그 두 양이 거의 비슷해 대체로 전체 양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래서 바닷물의 양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바닷물이라는 건 지구상에서 순환하는 물 전체의 일부일 뿐인데, 그 일부만을 따로 떼어내 증감이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바다가 좀 크기는 하지만 들어오는 물의 흐름과 나가는 물의 흐름이 있는 웅덩이와 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인위적으로 구획을 설정했다는 점에선 웅덩이나 바다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증감이 없다는 말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 전체를 보아야 한다.
지구상의 물은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비나 눈, 강이나 바다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일 수도 있고 수증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일 수도 있다. 물은 눈에 보이는 바닷물로 있다가 증발해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로 변하고, 그것이 모여 다시 눈에 보이는 구름을 이루면서 비가 돼 내리는 순환 과정을 거친다. 그 각각의 과정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지만, 물은 단지 형태를 바꾸었을 뿐 증가하거나 감소한 것은 전혀 없다.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물의 일부인 바다만을 보는 게 아니라 물 전체를 보는 것으로 시야를 확대하면,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사건과 변화가 모두 부증불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극미와 극대가 통하고, 부분인 개별자와 완전한 전체가 상응하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물이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의 늘어남과 줄어듦을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수증기가 물이 돼 증가하는 것처럼 보여도 증감이 없고, 물이 수증기가 돼 감소하는 것처럼 보여도 증감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이 있었던 그 자리, 하나의 변화가 있었던 그 자리가 바로 부증불감이다.
항성에서는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면서 물질의 질량이 빛에너지로 바뀐다. 질량만을 본다면 감소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질량과 에너지의 전체를 본다면 전혀 증감이 없다. 더욱이 질량과 에너지의 총합이 일정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우주 전체의 질량과 에너지를 일일이 다 셈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형태를 바꾸기는 하지만 질량이 에너지로 변해도 증감은 없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해도 증감은 없기 때문이다.
원래 부증불감이란 중도(中道)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중의 하나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 증가하는 것을 (+1)이라 하고 무언가 감소하는 것을 (-1)이라 하고, 그 (+1)에 (-1)을 더하여 0이라고 한다. 바다로 들어오는 물의 양과 증발해 없어지는 물의 양을 더해 0이 된다는 것과 같다. 부증불감의 중도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증가하는 듯이 보여도 증감이 없고, 감소하는 듯이 보여도 증감이 없어서 (+1)도 0이고 (-1)도 0이라는 것이다. 온갖 물의 증감을 다 더할 필요없이 그 각각이 다 0이다.
시인은 '온종일 봄을 찾아다녀도 끝내 보지 못하다가…. 집에 돌아와 매화향을 맡으니, 봄은 이미 그 가지 끝에 다 있더라'고 하였다. 봄을 찾아 천하를 헤매다가 마침내 매화가지 하나에서 봄의 향취를 맡으니, 천하의 봄이 내 뜰안에 있지 않은가. 보편적 진리는 바로 내가 서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양형진 고려대 교수.물리학
출처] http://service.joins.com/news_asp/narticle.asp?aid=2049443
대학교 일반 물리 시험은 주관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고등학교 교육을 우수하게(?) 받은 명문대의 자연대.공대.의대 학생들도 일단 주관식 시험을 보면 점수는 항상 1백점 만점에 0점에서 95점까지 차이가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화학.수학도 마찬가지다. 주관식 시험에서 이득을 보는 학생은 어떤 학생인가? 반대로 객관식 시험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한번 분석해보자.
현재 객관식 수능이 예전의 본고사보다 난이도가 낮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현재처럼 쉬운 수능시험, 쉬운 문제를 거의 다 맞혀야 하는 체제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은 누구인가? 아마도 일정 유형의 문제를 빨리 푸는 방식을 체득하고 쉬운 문제 틀리지 않기를 계속 연습하며 그 지루한 과정에서 반항하지 않는 부유층의 성격 좋은 범재일 것이다.
반면 이전에 한번도 보지 못한 주관식 수학.물리 문제를 그 자리에서 풀어야 하는 경우에는 머리 좋은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기회가 있다. 주관식 문제 풀이의 특성상 아무리 고액 과외를 받더라도 순발력 있고 머리 좋은 학생들을 당할 수 없다는 사실은 많은 '공부의 달인'이 동의한다.
주관식 문제 풀이에 내재한 엄청난 '불확실성'은 부유층 부모들이 볼 때는 너무나 억울할 수 있다.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겨우 18점이라니…. 이건 불공평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히 객관식을 선호하게 된다. 반면에 본고사가 있던 시절 가난한 집 수재들이 어려운 수학문제 1~2개를 잘 풀어서 대학에 잘 입학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보면 예전의 '어려운' 주관식 본고사가 있던 시절이 가난한 집 수재에게는 더 유리했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된다. 같은 주관식이더라도 점수차가 적은 현재의 작문식의 논술은 오히려 과외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돼 있다.
갈수록 더 복잡해지고 매년 바뀌는 지금의 입시 체제는 사회의 다양화를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정보'가 상대적으로 중요해짐으로써 역시 사회 상류층에 유리하게 돼 있다. 영어 특기생이라면 아무래도 외국에 갔다 올 수 있었던 부유층이 유리하고 해외 동포 특별 전형 역시 비슷하게 악용될 수 있다. 면접 점수가 중요해질수록 부유층의 '윤기 있는' 학생들이 그만큼 유리하다.
입시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지역할당제도가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이미 시작됐다.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나 미국에서 그리 성공하지 못한 소수우대정책 (affirmative action)의 딜레마를 답습할 위험은 있다.
소수우대정책은 여성과 흑인이나 라티노 등 사회 소외계층 학생들에게 대학 입학 특혜를 주는 것이다. 이 정책은 그러나 그 밑에 깔린 "너희는 능력은 좀 모자라지만 사회 발전을 위하여 마지못해 받아준다"라고 하는 부정적.인종차별적 메시지를 개인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가 항상 숙제로 남아 있다.
계층 간의 이동은 건강한 자본주의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혹자는 학벌을 욕하지만 학벌 없는 사회에서는 부자들만이 판을 치게 된다. 학벌 없어도 부잣집 아이들은 나중에 어차피 잘 먹고 잘 산다. 실제로 학벌은 가난한 수재들에게 필요하며 입시제도라는 것이 어차피 누구에겐가는 유리할 바에야 이들이 최대 고려 대상이 돼야 한다.
본고사 부활이 과외를 부추긴다면서 반대하는 것은 순발력이 필요하고 불확정성이 큰 주관식 수학.물리 문제 풀이가 가난한 수재들에게 얼마나 유리한가를 모르는 소치다. 부유층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본고사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교육 전면금지, 빈곤층 학생 사기진작 정책, 사교육 인력을 가난한 지역의 공교육 현장에 무상으로 공급하기, 영어와 이공계 과목 주관식 본고사 부활 등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닐까?
김대식 서울대 교수.고체물리학
출처] http://service.joins.com/news_asp/narticle.asp?aid=2039754
어느새 여름이 가고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느껴지는 계절이 됐다. 덥거나 춥다는 느낌은 우리 몸과 주변 사이에서 일어나는 열 전달의 양에 따라 정해진다. 겨울에는 주변에 열을 많이 빼앗겨 춥다고 느끼고, 여름에는 우리 몸의 열을 충분히 발산하지 못해 덥다고 느낀다.
물리학 교과서에는 어떤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전달되는 열의 양은 두 물체의 온도 차에 비례한다고 돼 있다. 이에 따라 여름에는 체온과 주변 온도의 차이가 작아 열이 잘 발산되지 못하고, 겨울에는 그 온도 차가 커 열이 지나치게 많이 발산된다. 이처럼 우리 몸에서 발산되는 열의 양은 우리의 체온과 주변 온도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적용되지 않는 현상도 많이 있다.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예가 목욕을 하고 나서 욕실을 나서면 갑자기 서늘해짐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물론 욕실보다 밖의 방에서 열을 더 많이 빼앗기기 때문이다. 욕실이나 밖의 방의 온도는 거의 같으므로 체온과 주변 온도의 차이는 두 경우에 비슷하다. 따라서 이 현상은 온도 차 때문에 생기는 열 전달의 차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습도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다. 습도가 높은 욕실과 달리 건조한 밖에서는 우리 몸에 묻어 있는 물기가 쉽게 증발한다. 액체가 기화해 기체가 되려면 상당한 양의 에너지가 공급돼야 하는데, 물기가 마르면서 우리 몸에서 기화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빼앗아간다.
액체인 물을 기체인 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체온이 공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방에 처음 들어설 때 특히 시원하게 느끼는 것도 젖어 있던 땀이 마르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는 시원함이라는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그 현상을 설명하는 원리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를 하나의 원칙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세계가 좀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원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 원리가 어떤 한계를 지니는지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원리 자체를 아는 것보다 그 원리의 전제 조건이나 한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하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같은 속도로 계속 움직이려 한다는 것으로 관성의 법칙을 이해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관성의 법칙이 이런 것이라면, 손에서 가만히 놓은 물체가 아래 방향으로 떨어지면서 가속된다는 경험적 사실과 모순을 일으킨다. 관성의 법칙에는 '외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이 들어 있으며, 이것이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한계를 부여한다.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뉴턴의 천체 운동에 대한 설명은 거대한 천체를 하나의 점으로 볼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세차 운동이나 조수 간만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려면 부피를 가진 천체를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의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던 이론적 모형이라도 다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리가 없다면 설명이 아예 불가능하겠지만, 원리를 절대화해 모든 것에 적용하려 한다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배가 아프다는 현상은 비슷하지만 못 먹어서 아프면 밥을 줘야 하고, 많이 먹어서 아프면 소화약을 줘야 하듯이 현상은 같거나 비슷하더라도 그 현상을 설명하는 원리나 이에 대한 처방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밥과 소화약이라는 것 자체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겠지만,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처방을 내리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선에서는 더울 때 얇은 옷을 입고 추울 때 두꺼운 옷을 입는 것이 도(道)라고 한다. 때 맞춰 알맞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유연함이 있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것 아닌가.
양형진 고려대 물리학
출처] http://service.joins.com/news_asp/narticle.asp?aid=2042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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