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의 잡학사전]
천자문은 우주 이치 담은 철학詩,
초급 한자책 아니다



1500년 전 양나라 주흥사가 하룻밤에 4자 250수의 운문으로 엮어

요즘 우리 사회에 한자 열풍이 거세다. 이는 중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난해 중국의 경제규모는 오랫동안 만년 3위였던 독일을 제치고 세계 3위로 올라섰다. 세계 2위는 일본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한자를 많이 쓰는 나라다. 한자문화권인 두 나라를 합치면 우리가 한자를 외면하고 사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 빠른 기업이 이런 트렌드를 놓칠 리 없다. 삼성 같은 대기업에서는 수년 전부터 입사시험에 한자 과목을 넣고 있다.

한자 공부 하면 대부분 천자문(千字文)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맞는 말이다. 개화기 이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서당을 다녔고 서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책이 천자문이었기 때문이다. 천자문은 이름 그대로 천 글자로 이뤄진 문장이다.

그러나 천자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우선 천자문은 4언절구로 이뤄진 시 250수(首)다. 글자 4자가 독립된 하나의 시라는 뜻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우리 모두가 아는 첫머리의 ‘하늘 천 따 지 가물 현 누루 황’과 바로 뒤의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을 보자.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은 흔히 ‘하늘과 땅은 검고 누르며 우주는 넓고 거치니라’로 번역된다.

잠깐 생각해보자. 아이들이 배우는 글에 웬 우주의 생성원리가 나오나? 천자문은 결코 만만한 수준의 책이 아니다. 천자문은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설파하는 철학 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천자문이 생긴 사연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통설에 따르면 천자문은 약 1500년 전 주흥사 (周興嗣·?~521)가 양(梁)나라 무제의 명에 따라 명필 왕희지의 글씨에서 뽑아 놓은 1000자를 하룻밤에 1구 4자 250구의 운문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하룻밤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드느라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부른다.

천자문의 글자 종류는 몇 개나 될까? 천자문은 중복되는 글자가 없으므로 1000 종류라는 게 널리 알려진 견해다. 최근 이를 반박하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해 ‘고금횡단 한자여행’을 쓴 김준연 고려대 중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천자문에는 깨끗할 결(潔)자가 두 번 나온다. 또 어우를 병(幷)자와 아우를 병(竝)자가 서로 통용되는 글자이기 때문에 둘을 하나로 보면 999자이기도 하고 998자라고 할 수도 있다.

아이 수준에서 볼 때 지나치게 어려운 천자문의 내용은 학문은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줘서 학습 의욕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천자문에 대한 찬사가 주류를 이뤘지만 그래서 혹평도 없지는 않았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술 ‘천문평(千文評)’에서 “가장 몹쓸 책이 천자문”이라고 지적했다. 천자문이 글을 이해하는 능력과 지혜의 샘을 여는 일에 가장 방해가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전통이 단절되면서 생겨난 현상의 하나가 천자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천자문을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어릴 때 천자문을 읽은 사람이라도 천자문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어릴 때는 불가능하고 연륜이 쌓인 중년 이후라야 가능할 것이다. 이는 삼국지를 어릴 때 한 번 읽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출처 : 주간조선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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